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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JSA)

손 내밀면 닿을 듯

마주보는 남과 북

  

 

한때는 ‘우리’였지만 이제는 ‘너와 나’가 되어 서로를 침묵으로 바라보는 곳이 있습니다. 한 발만 내딛으면 서로의 손을 잡고 얼싸안을 수도 있으련만···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혀 또 한 번 ‘우리’가 되는 꿈은 잠시 가슴 속에 넣어둡니다.

 

 

<판문점> 사진_파주시청

<판문점> 사진_파주시청

 

 

 

 

6.25 전쟁이 만든 새로운 이름, 판문점 

  

 

남과 북을 가르는 군사분계선 위, 시야를 가리는 장벽이나 철책의 방해 없이 남북한이 만나 얼굴을 맞댈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있다. 1953년 7월 27일 6.25 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오늘날의 DMZ를 탄생시킨 역사적 장소인 판문점이다. 판문점은 서울에서 서북쪽으로 62km, 평양에서 남쪽으로 212km, 그리고 개성에서는 1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 측 행정구역으로는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이며 북한 행정구역으로는 개성시 판문군 판문점이다.

 

판문점의 원래 이름은 ‘널문리’였다. 옛날 어느 임금이 널문으로 만든 즉석 널문다리로 강을 건너간 마을이라는 유래를 가지고 있다. 사천강가의 한적한 마을, 널문리는 언젠가부터 본래 이름 대신 ‘판문점’으로 불리며 세계 뉴스의 초점으로 떠올랐다. 1951년 7월 10일부터 개성시에서 시작된 휴전회담이 10월 25일 이곳 널문리로 옮겨지면서부터다. 

 

 

  • <1953년 7월 27일 휴전회담장 밖의 휴전협정 취재보도진 모습> 사진_국가기록원

    <1953년 7월 27일 휴전회담장 밖의 휴전협정 취재보도진 모습> 사진_국가기록원

  •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정전협정에서 지도에 군사분계선을 긋고 있는 양측 실무대표> 사진_국가기록원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정전협정에서 지도에 군사분계선을 긋고 있는 양측 실무대표> 사진_국가기록원

 

 

그렇다면 널문리는 어째서 ‘판문점’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태어난 걸까? 널문리에서의 휴전회담이 시작되자 중공군측을 위한 널문리의 중국어 표기가 필요했다. 휴전회담이 진행된 장소는 지금의 판문점에서 1km 북쪽에 있었으며, 초가집 4채와 회담장으로 쓰인 가건물 2채, 그리고 막사건물 3채가 있었다. 그리고 주막을 겸한 조그마한 구멍가게가 있었다. 널문은 한자로 ‘판문(板門)’이다. 여기에 구멍가게를 뜻하는 ‘점(店)’을 합쳐 ‘반먼디엔(板門店)’, 즉 ‘판문점’이라는 지명이 탄생했다. 

 

 

 

 

판문점의 또 다른 이름, 공동경비구역(JSA)

  

 

판문점의 공식 명칭은 공동경비구역(Joint Security Area : JSA)으로 박찬욱 감독의 2000년작 <공동경비구역 JSA>라는 영화로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판문점은 정전협정상의 비무장지대(DMZ) 안에 있으면서 군사 분계선상에 동서 800m, 남북 400m의 정방형의 지역을 설정하고 유엔군과 북한군이 공동으로 경비해온 ‘공동경비구역’이다. 판문점이 정전협정 이전부터 존재했던 널문리라는 자연부락에서 유래된 지명이라면 공동경비구역은 정전협정 이후 군사정전위원회 회의 개최시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군사분계선 상에 인위적으로 설정한 구역인 것이다.

 

 

<공동경비구역 내의 한국군과 북한군> 사진_파주시청

<공동경비구역 내의 한국군과 북한군> 사진_파주시청

 

 

예전에는 그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양측이 군사분계선을 넘나들었지만 1976년 8월 18일 북한군에 의한 도끼만행 사건이 발생한 이후 공동경비가 분할경비로 바뀌면서 이제 이 지역 안에서도 군사분계선을 넘어 상대방 지역에 들어갈 수 없게 됐다. 판문점 지역에 대한 경비는 그동안 유엔사령부 측이 맡아 왔으나 2004년 10월 이후에는 한국군이 맡고 있다.

 

  

 

 

판문점을 벗어나 함께 통일로, 화합으로 

  

 

판문점은 남북한 대결과 긴장의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소였다. 냉전시기의 판문점은 남북의 정치선전장이었고, 도끼만행 사건 등 군사적 충돌의 위기가 조성되기도 했다. 과거에는 판문점을 통해 북한 주민이나 공산권 외국인이 귀순해온 사례도 간혹 있었다. 그러나 1971년 9월 20일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이 열린 것을 계기로 판문점은 남과 북의 소통장소로 역할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판문점은 어느덧 남북한의 접촉과 회담을 위한 장소가 되었으며, 남북을 왕래하는 이들의 통과지점으로 활용되었다. 

 

 

  • <1975년 1월 24일 남북적십자 7차 실무회담> 사진_국가기록원

    <1975년 1월 24일 남북적십자 7차 실무회담> 사진_국가기록원

  • <2008년 10월 2일 남북군사실무회담> 사진_통일부 남북회담본부

    <2008년 10월 2일 남북군사실무회담> 사진_통일부 남북회담본부

 

 

판문점이 문을 활짝 열어젖혔던 가장 큰 사건은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이었을 것이다. 1998년 6월 16일, 그가 500마리의 소떼를 몰고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는 장면을 프랑스 문화비평가 기 소르망은 ‘20세기 마지막 전위예술’이라 표현하며 격찬하기도 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로는 화해와 협력 분위기가 이루어지면서 판문점을 통한 접촉과 회담도 잦아졌다.

 

그러나 세계 역사상 가장 긴 휴전을 관리하고 있는 판문점의 역사는 늘 순탄하게 흐르지만은 않았다. 국가 정책에 따라 사람들의 발길이 끝없이 이어지기도 했고 뚝 끊어지기도 했다. 분단과 대화라는 상반된 개념이 공존하는 이곳을 보며, 우리는 때로 긴장감에 몸을 떨었고, 때로는 희망에 웃음 지었다. 오늘도 그곳에서는 남북의 군인들이 조용히 마주보고 있을 것이다. 서로에게 한 걸음을 더 내딛기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한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간절히 바라고 소망하는 만큼 그 날은 빨리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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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 공동 지역

  

● 정전회담장

공동경비구역 중심부에는 동서 방향으로 7채의 단층 콘셋 막사가 일렬로 서 있다. 이 중에서 가운데 있는 것이 정전협정의 심장부인 판문점 회담장소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실이고 그 왼쪽이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이다. T2로 불리는 군사정전회담장은 남과 북의 방문객과 여행객이 다녀가는 관광 명소다. 회담장 안에서는 남측 여행객은 북측으로, 북측 관광객은 남측으로 갈 수 있다. 남북 한 쪽의 여행객이 방문하면 반대쪽 출입구를 일시 폐쇄하고 경비병들의 보호 통제하에 관광이 이루어진다. 

 

● 돌아오지 않는 다리 

‘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우리측 평화의 집 뒤쪽 사천강 위에 위치해 있다. 이 다리 중간을 군사분계선이 가로지르고 있는데 정전협정 조인 후 이 다리를 통해 포로교환이 이루어졌을 때 양측 포로들이 이 다리를 통해 남쪽과 북쪽으로 송환되면서 일단 이 다리만 건너면 그 누구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하여 ‘돌아오지 않는 다리(Bridge of No Return)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다리는 개성에서 공동경비구역으로 출입하는 다리로 사용되었으나 1976년 8월 18일 도끼만행 사건이 발생한 이후 통행이 금지됐다. 

 

 

■ 우리측 지역

  

● 자유의 집

우리측 건물인 자유의 집은 통일의 뜻을 북으로 날려보내는 마음을 표현한 방패연 모양을 하고 있다. 건물 양면의 곡선도 통일의 소망을 담아 두 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현재 자유의 집은 1998년에 신축된 4층 건물로 1층에는 로비·기자실·편의시설, 2층에는 대기실·사무실·회의실(향후 우편물 교환소 등으로 활용), 3층에는 남북 연락사무소·남북 적십자 연락사무소·대회의실(향후 이산가족 면회실 등으로 활용), 4층에는 전망대와 다용도 공간이 위치하는 등 남북교류 활성화에 대비하도록 설계되어 연락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 평화의 집

1989년 판문점에서의 남북 대화가 활발해질 것에 대비하여 판문점 내 우리측 회담 시설을 확충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1992년 남북 연락사무소(남측)와 직통전화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1998년 ‘자유의 집’이 완공되면서 옮겨갔다. 평화의 집은 연건평 600평의 3층 석조건물로 1층은 귀빈실과 기자실, 2층은 회담장, 3층은 연회실로 꾸며져 회담 뒤 대표단의 식사나 모임 장소로 쓰이고 있다. 

 

  

■ 북측 지역

 

● 판문각

판문각은 판문점 내에 북측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물이다. 북한은 정전협정 체결 이후 12년간 판문점을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다가 1964년 공개하기 시작하면서 현재의 판문각 자리에 육각정을 지었다. 그후 1969년에 육각정을 헐고 판문각을 신축했는데 판문각은 남쪽에서 보면 웅장한 석조 건물로 보였으나 건물 내의 폭은 좁았다. 그래서 북한은 1994년 판문각 중축공사를 시작해 12월에 완공했으며 건물을 3층으로 높이고 건물 폭도 확장하였다. 

 

● 통일각

1985년 북측이 판문점 회담 시설로 준공한 통일각은 남측 지역 ‘평화의 집’과 대칭되는 개념으로 연건평 460평의 지하 1층, 지상 1층 건물이다. 1992년 5월부터 북측 남북 연락사무소로 사용되면서 판문점 북측 지역에서 개최된 주요 남북회담이나 접촉은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통일각에 설치된 북측 남북 연락사무소는 직원 5~6명이 상주하면서 직통전화 2회선 등을 통해 남측과 연락업무를 수행해왔다. 통일각은 판문각에서 서북쪽으로 100미터 정도 떨어져 있어 잘 보이지 않는다. 

 

● 72시간 다리 

1976년 8.18 도끼만행 사건 이후 ‘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폐쇄되고 판문점 내의 경비는 양측이 함께 담당해 온 공동경비에서 분할 경비로 바뀌었다. 북한은 그간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통해 판문점에 드나들었으나 다리가 폐쇄되자 공동경비구역으로 출입하기가 어려워졌다. 이에 급히 통일각 뒤쪽의 사천강에 북쪽으로 콘크리트 다리를 하나 구축했다. 이 다리를 건설하는 데 걸린 시간이 72시간이라고 해서 유엔사는 이 북한의 새 다리에 ‘72시간 다리’라는 별명을 붙였다.

 

 

정보등록

2014.08.11.

정보확인

2016.11.03.

2017.04.07. 

출처

  • 『판문점 리포트』(2003), 장승재, 삶과꿈

  • 『미래를 위해 남겨 놓은 과거, DMZ』(2010), 함광복, 통일부 통일교육원

  • 통일부 통일교육원(www.uniedu.go.kr)

  • 통일부 남북회담본부(dialogue.unikorea.go.kr)

  • 국가정보원(www.nis.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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